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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시간여행 (김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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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04 11:12 조회3,2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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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시간여행

 

사할린 한인역사기념사업회의 부산우리민족서로돕기 회에서 사할린 동포 무연고희생자 추모관를 건립 한다는 후원모집 광고를 봤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전화하여 작지만 10만원을 후원하겠다고 전화하고 후원금을 보냈다. 나는 소심하고 남 앞에 나서지를 못해 항상 세상살이에서 뒤처지는 듯하여 나 자신에게 불만이 많았다. 이 못난 의식을 좀 고쳐야하겠다고 마음먹고 항상 남 먼저 입으로 약속하고 바로 행동했다. 그래야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을 거닐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지배로 36년간의 독립운동과 지배역사를 알고 있다. 그간 정치지도자들의 무성의와 역사의식 미비로 올바른 역사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도 보아왔다. 특히 성노예자(위안부), 일제 군수공장 강제 징용자, 원폭피해자, 사할린 동포 문제 등 1965년 한일문제를 정치적으로 일괄 처리하면서도 포함되지 않은 문제에 일본의 무책임한 전후 책임 회피와 방해를 목격하며 일본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데도 그들 처사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1945년 8.15일 해방이 되자 사할린에 거주하는 일인들은 전원 일본군함을 타고 귀환했다. 일본정부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시켜 출국금지 조치로 한명도 귀환하지 못했다. 그 후 쏘련은 국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귀환시키거나 보호책임을 지지 않았는데 남북분단과 동서 냉전 상태로 극동 변방의 이민족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북한과의 관계와 태평양지역 진출에 필요한 사할린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개발에 필요한 인력부족을 이유로 이들의 이동 자유를 금지시켰다.

 

그런 정황을 전혀 알지 못한 동포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브이코프석탄광산에서 300여리 떨어진 유즈노사하린스크 남쪽항구 코르사코프항 까지 달려갔다. 자신들이 떠나왔던 일본 홋카이도가 멀리 보이는 동산에 올라 하루 이틀 지나 일주일 또 한달, 두 달을 기다려도 일본인들을 싣고 떠난 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간다는 기대는 절망감으로 변하고 결국 우울과 병마와 추위와 기아로 쓰러져 8000여명이 무주고혼이 되어 70~80여년 이역만리 사할린 땅 허공을 해매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한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은 쏘련 땅 연해주에 거주하던 30여만명 동포들을 일본에 첩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스탈린이 1935~6년 중앙아시아 광활한 허허벌판에 강제 이주시켰어도 살아남았듯이 사할린동포들도 그 땅에서 살아남았다.

그 후 광복 70년이 지났는데 사할린에 방치된 43,000여명이 80년 가까이 멀고 먼 사할린 땅에 살아온 역사도 억울한 일이다. 또 사할린 동포문제는 한, 일국가간 협상 아닌 적십자 협의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문제이다. 그동안 나름의 노력으로 1957년 일부 일본인과 결혼한 동포 1,541명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1989~1995년까지 연인원 7천여 명이 일시방문과 1991~2011년까지 4,008명의 동포가 국내 경북 고령 대창양로원, 인천 사할린복지관, 안산 고향마을 등과 전국 임대아파트에 영주귀국 하였다. 지금 일부 1세대가 귀국했지만 90%이상이 사망한 중에 배우자가 있거나 장애자를 동반한 2인만이 영주귀국 했다. 지금 2~4세대까지 생겨났고 대부분 러시아 국민이 되어버린 상태로 전 가족이 귀국 할 수가 없어 생이별을 한 처지이다. 특히 1, 2세대와 그 자손들 생활습관과 의식구조가 판이하여 불화상태가 되기도 한다.

 

12세기 몽골이 전세계지배하며 사할린이 세계역사에 등장하면서 16세기 프랑스, 18세기 러시아의 극동지역 유형지로, 19세기 영국인의 세력 확장진출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북위50이남 남사할린지역과 쿠릴열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여 사할린과 쿠릴열도가 러시아에 이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본 홋카이도에 연이어진 쿠릴열도는 지금도 러시아와 4개 섬에 대한 영토분쟁지역으로 지정학적인 점과 일본인들이 사할린에 진출하여 1800년대부터 어업활동을 하며 살았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다.

 

우리 동포들이 사할린樺太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00연대 연해주沿海州에 이주한 동포들이 건너가 살았고 일제 강점기인 1937년부터 광산개발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일본인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여 가까운 경남지역인 들을 유인하여 생계형 노동자로 진출시켰으나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국가총동원령에 의하여 강제징용으로 대량 끌어가서 진출자가 60,000여명에 이르렀다.

*추모관 짓기

부산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회에서 8000여 무연고 희생자들 영혼을 편히 모셔 안식과 그땅에 살고있는 동포들의 쉼터를 마련하고자 무연스님과 현지에 사업를 하는 사업가 한덕수님을 공동대표로하고 뜻을 같이하는 각계 시민들이 모여 모금운동을 하고 추모관 완공을 위해 부지선정과 치밀한 계획을 새우고 추진하였다.

추모관 짓기가 시작되자 주위에서 잡다한 잡음이 들리기도 했다. 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지어서 추모관을 근거로 사할린 사업과 동포들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의심하며 선수를 빼앗긴 억울함을 진정하며 음해적 소문을 확산하기도 했다.

해방 75년이 되었어도 추모관 하나 없고 동포들이 모여 쉴 수 있는 공간하나 없이 이국땅에서 볼썽사납게 대립한다는 게 명분도 없고 사업의미를 떨어지는 일이기에 설득과 추진에만 몰두하였다.

많은 이들의 뜻을 모우기 위해 한겨레신문사의 통일문화재단과 함께 추진하며 신문광고를 통하여 홍보에 주력하였다.

무주고혼 8000명 안식을 위해 위패를 모실 공간과 동포들이 쉼터로 활용할 강당 및 제단 등이 들어설 건물 터를 선뜻 공동 위원장인 사할린 사업가 한덕수씨가 자신의 농장(록산원)입구 대로변 땅을 내놓았다. 그리고 추모관을 위해 시민 모금한 돈은 한 분 한분 위패제작을 하는데 썼다.

그리고 준공식을 할 때 사할린에 함께 참석하기로 공지를 했다.

 

사할린 징용 희생자 추모 사업은 2014년부터 시작하여 2018.8.30일 추모관 준공식을 치룬 날까지 추진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2014.10.2 : 부산 삼광사 선망 사할린동포 추모식

2015.4.29~8.11 : 사할린 강제 징용 희생자 합동추모비 제작.

                8.11일 추모비 제막식 및 위령제와 추모관 기공식(록산원)

2016.8.27~30 : 제3회 일제 사할린 징용한인 희생자 추모제(사할린 현지)

2017.8,5~8 : 제4회 일제 사할린 징용한인 희생자 추모제(사할린 현지)

     8월~9월 : 사할린 징용 무연고 희생자 위패제작 모금 캠페인-한겨레신문

2018.2.22 : BBS불교방송 사할린 징용 희생자 추모관 건립 소개

  8.30~9.1 : 일제 강점기 징용 무연고 희생자 추모관 준공식 및 위패 봉안.

                   (부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와 회원 및 시민추모단 80명 방문)

 

일제 강점기 사할린 징용 무연고자 위패제작 성금후원자는 개인 김옥남외 120명, 단체 부산시경찰청 외 14개 단체이다.

추모관 준공식에 축하현수막과 기타 후원자는 오거돈 부산시장 외 25개단채장이었다. 그리고 추모관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기위해 경비 100여만 원을 들여 참석한 개인추모객은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통일문제연구소장 권혁철님외 독자 12명과 각 사회단체장들과 공연 민예총국악명인, 예술단원 및 시민, 봉사학생단원 등 80여명이 함께했다.

특히 부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무원스님과 공동대표 한덕수 사할린 록산원 현지사업가의 무한한 봉사와 노고로 추모관이 건립된 것에 무한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또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김덕룡, 송기인 신부, 김대선 원불교교무, 이상철 평화통일 시민연대 고문 등 연로한데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같이하는 진정성에 희생자님들의 맺힌 한이 조금이나마 지워졌으리라 위안이 되었다.

 

*추모관 준공식에 가다

사할린 징용 희생자 추모관이 완공되어 준공식을 거행한다는 공지가 났다.

일정은 2018.8.30(목)~9.1(토)일로 준공식은 8.30일 16시30분에 열리고 장소는 러시아 사할린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녹산원이다. 사할린 인구 48만 명 중 러시아인이 84%이고 한인은 3만명(6.3%)이다. 유즈노사하린스크 인구는 18만 명중 한인은 50% 정도가 주도에 산다.

하루 1편씩 아시아나 항공이 운항중인데 항로는 일본 쪽으로 돌아 열도를 따라 동해로 북한영공을 피해 사할린으로 들어간다.

인천공항 09:05분 출발예정으로 07시 집결하기로 해서 바삐 서둘렀는데 출발시간이 1시간 늦어진다고 예고되었다. 그런데 2시간 늦게 출발해서 사할린공항 도착시간 14:10분도 2시간 늦어져 추모관 준공식 시작시간 16:30분을 훨씬 넘겨버렸다.

사할린 공항 규모나 시설도 빈약했지만 입국절차가 까다로운 것은 지난 북유럽여행 때 익히 학습되어 알고 있듯 수만리 떨어진 극동 변두리도 러시아 땅임을 실감했다.

앞서 화려하게 치르려던 식전, 식후 풍물패, 가야금, 소리꾼, 춤꾼 등 국악 축하공연단의 우리문화 공연으로 추모관에 모셔진 원혼들을 위로와 살풀이로 해원해 드리고 동포들에게도 위안을 드리려 했는데 대폭 축소되어 아쉬움이 컸다.

절차에 따라 추모관 부지기증과 진행을 직접 맡아 휴일도 없이 가족과 직원들을 독려하여 준공에 이른 부산 우리동포서로돕기 공동대표 SSD그룹 한덕수회장님이 경과보고를 했다. 공동대표 무원스님의 축원문 독송과 참석인사 들의 격려사, 헌화 등으로 마무리했다.

 

부모 잃은 자식의 슬픔은 한평생이지만,

조국 잃은 민족의 통한은 만년을 간다..

사할린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하다 죽어간

원통한 넔 7천4백 위를 여기 모심은

단순한 위령만이 아니라

민족의 통한을

만년에 걸쳐 기억하고자 함이다.

 

조정래

님은 이렇게 새겼다.

 

성대하게 차린 만찬을 동포들과 방문객이 너른 식당을 가득 채우고 흥겨운 우리 가락 공연으로 흥을 돋우는 분위기에서 하나 되어 한식과 고유 현지음식차림으로 향연을 즐겼다.

하루 길고 뜻 깊은 하루를 마감하며 일행들이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로 나뉘어 잠자리에 들었다. 사할린의 강남이라 일컫는 곳의 게스트하우스는 한덕수사장이 사할린에 오는 한국 손님이나 여행객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한 건물이라는데 시설이 좋고 식사를 준비해줘서 편리했다.

한 여름인데도 저녁이 되니 쌀쌀하여 한기가 들어 전기장판에 불을 넣고 자고나니 피로가 풀렸다.

 

*사할린 둘러보기

다음날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혹독한 차별과 강제노동을 하며 해방되어서도 귀국하지 못하고 한 맺힌 일생을 살아오다 희생된 동포들의 흔적을 찾아 둘러보는 일정이다.

1945.8.15일 일제가 황망히 빠져나간 자리에 우리 탄광에서 일했던 동포들만 남아 귀향하지 못하고 주도 유즈노사하린스크에서 생존했다.

버스로 30여분 달려 코르사코프 항구 뒤 언덕 망향동산으로 달려갔다. 45km 멀리 맑은 날이며 홋카이도가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망연히 귀국선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했던 무주고혼의 주인공들과 겨우 생존했던 동포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멍멍 해진다. 마치 그날의 풍경같이 저 멀리 검은 구름 아래 거친 파도와 찬바람이 몰려오며 처절한 울움 소리로 들려온다.

2017년 망향동산에 고국 쪽을 향해 망향탑을 새워 참배하며 배의 강철판을 소재로 하여 간절함을 형상화하여 의연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도심 외각에 우리 동포들이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제1공동묘역이 있다. 묘지문화는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사할린도 도시 근방에 매장공동묘지가 있는데 석판으로 덮개를 덮고 앞쪽에 작은 비석을 새우고 주소 이름 생년월일과 사망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사진이나 얼굴부조가 새겨져 있다.

지난 2015년에 합동추모비를 새우고 매년 사할린동포들과 합동으로 8.15일 추모행사를 하며 참배를 한다. 추모비는 연화무니 좌대 위에 석비를 새우고 관모를 장식했다.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를 밝힌다. 우리가 2015년 공동묘역 들머리에 추모비를 새우고 난 후 2016년 일본에서 묘역 중앙에 평화관음상을 새우고 너른 추모 공간을 만들어 매년 8.15일에 와서 추모행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제1묘역에는 한인들과 러시아 주민들 묘가 있고 일인은 1기도 없는데 옛날 자신들 땅이라서 그런다고 한단다.

 

추모비에 작가 한수산님이 비문을 썼다.

 

떠나온 고향이여, 돌아갈 수 없던 조국이여

그리움은 흘러 몇 구비

흐르는 것이 어찌 강물뿐이더냐

잊지 않고 간직했던 고향 주소여

베갯머리 적시던 고향생각은 꿈길이 아니라 꽃길이었네

조국에 잊히고 시대에 뒤엉키며

역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세월

고난 가득한 삶에도

눈물은 세월과 함께 마르고, 고통의 밤에도 새벽은 밝았다

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간 길

생명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다, 이제 여기 묻히니

부디, 잊지 말라

기억하지 않은 자에게 역사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부산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건립 합동추모비 비문(한수산 씀)

 

오후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120km정도 북쪽에 있는 브이코프탄광촌을 찾아갔다. 일본 지명으로 나이부치 탄광이다. 미쓰비시 광업주식회사 소유였다. 사할린에서 남북을 잇는 유일한 고속도로지만 우리나라 4차선 국도수준인데 휴게소 같은 편의시설도 없어서 불편했다.

6만여 우리 동포들이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평생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했던 지옥 같은 탄광을 찾아가며 좀 불편하다고 뭐에 그리 대수겠는가?

80여 년 전 낮 설고 물 설은 사할린 땅에 사랑하는 가족들 목숨 줄 이어가기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왔건만 항구에 닿자마자 며칠을 걸으며 지친 몸을 부렸던 탄광이 이리 멀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10여 년 전까지 탄광이 지속되었는데 이제는 폐광이 되어 거의 방치되어 있다.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400여명 동포들이 지금도 주변 마을에서 생활하며 탄광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폐허가 된 탄광의 을씨년스런 옛 건물들이 그대로 회색풍경을 드러내고 있는데 날씨마저 우중충한 표정으로 하나둘 빗방울을 뿌린다. 지하갱도를 들어가는 몇 백 미터 길 다란 비 가림 건물에 채탄철로는 이미 흔적만 남긴 채 뜯겨 사라지고 창들과 천정도 난잡한 어지러운 모습이다.

차마 현장을 들어서기 두렵게 어둑하고 낮선 곳이지만 부서진 창문으로 바깥 푸르른 빛이 몰려들며 완전 대비되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다.

건물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하갱도가 시작되며 완전 폐쇄되고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있다. 다시 되돌아 나오는 어두운 갱도에 옛 탄광에서 탄부로 살았던 사할린 동포들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탄광촌의 철도 물탱크, 선탄장, 집탄장, 주거지 등 흔적들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퇴색되고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며 우울한 감정이 겹친다. 폐허더미에 빨간 물봉선, 흰 코스모스, 노오란 민들레꽃 들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주위 짙푸른 숲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러시아 동토에 널려있는 자작나무 숲이 사할린 전역까지 이어진 듯 울창하다.

 

*사할린을 떠나다

3일째 되는 9.1일에는 오전에 사하린스크시 외곽 너른 터에 자리 잡고 있는 레닌광장에 시청, 국립박물관, 향토역사박물관, 동방정교회 등을 둘러보았다. 사할린에서 대표적 시설지역으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역사와 발전의 정신적 기반을 조성하여 사할린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한번 둘러볼 만하다.

사할린에서 러시아 동방정교회의 전통양식 건물로는 유일하게 웅대하고 화려하다 생각되며 내부도 둘러봤다. 성인상이나 성모상의 벽과 천정의 금빛 찬란한 성화가 모스크바의 돔 대성당양식을 그대로 복사한 듯 낮 익은 건물이 우뚝하고 좌우로 역사박물관과 전쟁박물관 등이 펼쳐져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향토역사박물관이 제법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사할린 역사, 풍속. 자연, 전통 등 각종 유물들과 1905년 러일전쟁 패전 후 일본의 남사할린 지배역사까지 전시되어 동포들의 아픔을 엿볼 수 있었다.

오후2시에 공항으로 출발하여 4:30분 비행기를 타는 시간까지 까다로운 탑승수속과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러시아변방 지역행정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사할린이 남한의 75%정도인 작지 않은 곳에 48만 명 정도 사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참 어렵게 사는 구나 느껴진다. 경상도 산골에서 징용으로 끌려오며 한 달이나 걸렸다는데 비행기를 타고 서너 시간이면 닿는 조국 땅이 이웃인데 80년이 지난 세월동안 어찌 이렇게 더딘지 답답하다.

거침없이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며 역시 나 사는 곳이 좋다 여기면서도 내가 거길 왜 갔는지? 단순한 여행만은 아니란 생각에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끝 2018.10.15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

 

 

 

추모관 내부

 

 

 


예술단원의 무주고혼 해원굿 춤

 

 

 


유즈노사할린스크 녹산원 - 일제강점기사할린징용희생자추모관 준공

 

 

 


홋카이도가 바라보이는 망향동산 아래 코르사코프항과 망향탑


 


제1공동묘역  - 일제강점기사할린징용희생자 합동추모비

 

 



주인이 확인된 묘지와 무연고 묘지

 

 

 

 





10여년 전에 폐광이 된 브이코프탄광

 

 

 

 




동방정교회

 

 

 

 

전쟁박물관, 정교회성당, 국립박물관

 

 

 



향토박물관에 많은 이들이 관람객으로 온다.

 

 

 

 


귀국 썰물 때 인천공항 바깥 바다풍경 

*지난 2018.8.30~9.1일까지 사할린동포추모관 준공식에 다녀온 후 기록을 남기기위해 썼던 여행기입니다.

혹 부산우리민족돕기 단체의 승고한 정신과 실천노력에 기록상 오류나  이해부족으로 누를 끼칠까 봐 망설이다가

오늘에야 홈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잘못된 표기나 불필요한 기록으로 삭제가 필요한 사항은 저의 메일로 보내주시면 잘못을 수정하고 정확한 내용을 알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남북화해와 평화가 이뤄지면 어려운 우리민족동포들을 돕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슴니다.

용인에서  김옥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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